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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까페

올드 라스푸틴 (Old Rasputin, North Coast Brewing Co.)

by nGroovy 2016.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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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Old Rasputin Russian Imperial Stout

Brewery : North Coast Brewing Co.

Country : USA

Style : Russian Imperial Stout

Color: Black

ABV: 9%

Bitterness: 75 IBUs


상표와 맛 향 모두 독특한 괴승




요승 라스푸틴의 전횡(1915년 ~ 1916년)

네이버 지식백과


왕조가 망할 때에는 여러 가지 조짐이 나타난다. 경제가 파탄나면서 민심이 이반되고 충신이 제왕의 곁을 떠나며, 어리석은 신하들 사이에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횡행한다. 우유부단한 왕은 다가오는 위기를 보지 못하고 간신들에게 정사를 맡긴 채 부질없는 일에 탐닉한다. 백성들 사이에는 온갖 풍문이 꼬리를 물고, 뜻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과 함께 하면서 후일을 도모한다.


1차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허약하기 짝이 없던 로마노프 왕조를 붕괴일로로 몰고 가는 요인들이 착실하게 성숙해갔다. 많은 병사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엄청난 인원과 물자가 전쟁에 동원되면서 경제는 파탄나고 국민들은 큰 괴로움을 겪었다. 그 와중에서도 막대한 이윤을 챙긴 자본가와 그에 미혹된 정치가들은 '조국방위의 성전'으로 국민들을 계속 내몰았다. 대중들 사이에 반전 분위기가 고조되고 정부와 황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당시 황실을 지배한 사람은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아니었다. 무능하고 심약했던 차르 뒤에는 드세고 편협한 황후 알렉산드라가 있었고, 황후 뒤에는 그녀가 신처럼 떠받드는 요승 라스푸틴이 있었다.


패전이 계속되던 1915년 여름, 황후와 라스푸틴은 자신들을 견제해온 총사령관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들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니콜라이 대공을 해임하라고 차르에게 간언했다. 8월 23일, 많은 각료들이 극구 반대했음에도 차르는 니콜라이 대공을 해임하고 스스로 총사령관에 올랐다.


이틀 뒤인 8월 25일, 온건 자유주의자들의 '진보 블록'이 차르에게 신임내각의 구성과 온건한 개혁을 요구해왔다. 차르는 '진보 블록'과의 협조를 진언하는 몇몇 각료의 말을 무시하고 이 요구를 거절했다. 자유주의자들과 협조할 수 있는 기회도 팽개쳐버리고 충언을 하는 신하들까지도 내쳐버린 차르는 이후 황후와 라스푸틴에게 점점 더 의지해갔다. 총사령관이 된 차르는 수도를 비우고 전선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라스푸틴은 충실하기 그지없는 여신도인 황후를 등에 업고 전권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차르의 결정이 필요한 사안은 황후를 시켜 차르에게 편지 한 장만 띄우면 그만이었다. 1916년 12월 말 암살될 때까지 라스푸틴은 사실상 러시아의 황제나 다름없었다.


라스푸틴은 본디 시베리아의 농민 출신으로 말을 훔치다가 마을에서 쫓겨난 후 수도원을 전전하는 '돌중'이 됐다. 그의 종파는 최면술을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신흥종교였다. 그는 1904년에 페테르부르크로 와 점잔 빼는 귀부인들 사이에서 많은 신도를 얻었고, 마침내 황후 알렉산드라까지도 사로잡았다.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사이에는 뒤늦게 얻은 알렉세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황후는 알렉세이를 끔찍이도 아꼈다. 알렉세이는 황후의 권력을 유지해주는 버팀목이기도 했다. 어머니 쪽에서 독일 왕가의 피를 물려받은 황태자는 많은 유럽 왕실을 괴롭히던 혈우병에 걸려 있었다. 황제와 황후는 조그만 상처가 종창으로 발전할 때마다 알렉세이가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바라볼 뿐이었다.


당대의 유명한 의사들도 혈우병체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라스푸틴이 최면술을 걸어 알렉세이의 병을 '치유'했다. 라스푸틴의 '처방'이 어떻게 먹혀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알렉세이는 그 후 크게 괴로워하는 일이 없었고, 라스푸틴은 황후에게 살아 있는 성자가 됐다.


황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라스푸틴은 이제 막강한 권세를 얻었다. 심약한 니콜라이 2세는 매사를 대가 센 아내의 뜻에 따랐고, 황후는 매사 라스푸틴에게 자문을 구했다. 라스푸틴은 황후와 황제에게 '우리의 친구'가 됐다.


1910년경 라스푸틴에 관한 얘기가 신문에까지 보도되면서 그를 질타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라스푸틴은 궁정에서는 매우 정중하게 행동하고 농민의 꾸밈없는 소박함을 보여주었으나, 밖에만 나오면 '개'였다. 그는 어리숙한 귀부인들에게 '육체의 속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며 숱한 여성들을 농락했다. 수상 스톨리핀은 라스푸틴을 시베리아로 유배 보내려 했으나, 황후에게 밀려 실패하고 얼마 안 있어 암살당했다.


라스푸틴의 권세는 이제 하늘을 찔렀다. 모두들 황후와 라스푸틴에 대해서 뒤에서만 수군거릴 뿐,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라스푸틴은 정치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고, 1915년 초가을 차르가 총사령관이 되어 전선으로 출동하면서 러시아는 이제 라스푸틴의 것이 됐다. 내무장관과 전쟁장관이 라스푸틴과 교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돌아갔고, 며칠이 멀다하고 내각이 해산되고 개각이 이어졌다. 장관들의 목숨과 주요정책의 방향은 이제 라스푸틴의 손아귀에 쥐여 있었다. 라스푸틴은 또한 꿈에 계시를 받았다며 황후를 통해 전선의 차르에게 '명령'을 내렸다. 황후는 차르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써서 '성자'의 조언을 전했다.


"우리의 친구가 식량공급은 걱정 말랍니다. 다 잘될 거라는군요."

"우리의 친구가 너무 고집 세게 진격하지 말라고 합니다. 손해가 더 클 거래요."


수도의 거리에 황후와 라스푸틴의 관계를 조롱하는 벽보가 나붙고, 둘이 동침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두 사람이 독일과 결탁하여 단독강화를 획책하고 있다는 소문도 횡행했다(라스푸틴 일파는 실제로 독일과 강화하여 왕조를 유지하고자 공작을 폈다). 마침내 대황후가 전장으로 달려가 차르에게 수도 귀환을 청했으나, 차르는 라스푸틴이 '신께서 보낸 성자'라면서 어머니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일반대중은 물론, 귀족들 사이에서도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1916년 가을, 위기가 깊어지면서 대중들의 시위가 날로 격해지고 병사들의 동요도 뚜렷해졌다. 자본가들 사이에 쿠데타 움직임이 싹트고, 황실과 귀족사회 한구석에서까지 황제를 퇴위시키고 니콜라이 대공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위기를 느낀 황실 측근들은 라스푸틴을 죽여 황실을 구하고자 했다.


암살 주모자는 황제의 조카인 이리나 공주의 남편으로 당시 러시아 최대의 유산 상속자였던 유스포프 공과, '검은 100인조'의 창설자 푸리슈케비치였다. 그들은 평소 라스푸틴이 아리따운 이리나 공주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것을 이용하여 그를 암살하기로 했다. 12월 말, 그들은 공주를 딴 곳으로 빼돌리고 공주의 초대장으로 라스푸틴을 유스포프의 저택으로 불러냈다. 1층의 '암살실'은 호화롭게 꾸몄고 식탁 위에는 청산가리를 넣은 과자와 독이 든 포도주를 올려놓았다.


라스푸틴은 유스포프가 친히 모셔왔다. 유스포프는 공주가 2층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는데 곧 내려올 거라면서 그에게 계속 술과 과자를 권했다. 독이 퍼진 라스푸틴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기타를 잘 치는 유스포프에게 집시 노래를 들려달라고 했다. '겁에 질린 암살자'는 기타를 치고 '시체'는 술 마시며 노래 부르는 기이한 광경이 몇 시간이나 계속됐다.


견디다 못한 유스포프가 마침내 권총을 꺼내 라스푸틴을 쏘았다. 라스푸틴이 고꾸라지고 2층에 있던 공모자들이 뛰어내려 왔다. 그때 갑자기 '시체'가 벌떡 일어서서 유스포프의 어깨를 움켜잡더니 견장을 북 뜯어내고는 비틀비틀 옆문 쪽으로 걸어갔다.


푸리슈케비치가 연신 몇 발을 쏘아 라스푸틴을 쓰러뜨렸다. 공모자들은 밧줄로 시체의 양손을 묶어, 얼음을 깨고 강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사흘 뒤 라스푸틴의 시체가 발견됐다. 손을 묶은 밧줄은 풀려 있었고, 폐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사인은 독에 중독돼 죽은 것도 아니고 총 맞아 죽은 것도 아닌, 익사였다. 어쨌든 라스푸틴은 죽었고, 살인자들은 동정적인 여론에 힘입어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라스푸틴을 제거해 황실을 구하려는 암살자들의 기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니콜라이 2세는 이제 가족들과 함께 차르스코예 셀로 별궁에 묻혀 혁명의 전조를 외면했다. 어느 정도 사태를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던 라스푸틴은 차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예언한 바 있었다.


"나는 내년 1월 1일이 되기 전에 죽을 것 같습니다. ···만일 내가 귀족들에게 살해된다면, 그들의 손은 나의 피로 젖을 것이며 25년 동안 그 피는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나의 죽음을 가져온 자가 폐하와 친척 관계인 사람이라면, 폐하의 자녀와 친척 어느 누구도 2년 후까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1917년에 접어들면서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연일 파업과 시위가 계속됐다. 니콜라이 2세는 라스푸틴이 암살된 지 두 달 남짓 후 제위에서 쫓겨났고, 그로부터 1년 남짓 후 온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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