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오래 앓은 기침소리와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그래 지금은 모두들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자정 넘으면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한줌의 눈물을 불빛.. 2017. 6. 1.
결혼에 대하여 -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해라봄날 들녁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깍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2017. 6. 1.
오래된 농담 -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평 받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 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 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 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 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 2017. 6. 1.
반응형